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문단 편집) === 북베트남에서의 프랑스의 군사적 패배 === 1951년 2월, 베트민은 공세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하여 [[하노이]] 해방을 목표로 전면 공세를 개시했다. 그러나 [[장 드라트르 드타시니]] 장군이 미리 하노이, 통킹만, 홍강 삼각주까지 연결된 '''드라트르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드라트르 장군은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네이팜탄을 사용하여 베트민군의 대대적인 전면 공세에 맞섰다. 베트민은 이 방어선에 철저히 막혀 도리어 수천명 이상의 큰 사상자만 남긴 채 하노이 함락에 실패했다.[* 그에 비해 총공세시기 프랑스군은 400명의 전사자와 1,200명의 부상자가 나오는 선에서 그쳤다.] 그러나 1952년 타시니 장군이 악화된 지병 때문에 프랑스로 귀국하면서 전세는 베트민 측으로 급격히 기울어졌다. 설상가상으로 프랑스는 15만명의 베트남군이 거의 쓸모가 없어[* 이게 당연한 게 형식상으로 독립한 [[베트남국]]의 국군 간판을 내걸고 모집했는데 실질적으로는 식민지 시기처럼 프랑스 장교들의 지휘를 받았다. 병사들의 사기나 의욕이 생길래야 생길 리가 없었을 것.] 19만의 [[프랑스군]]만으로 전쟁을 해야 했고 초반에는 어리버리하기까지 했던 베트민군은 전투를 통해 순식간에 정예로 탈바꿈하였다. 이후 프랑스군은 여기저기서 지속적인 피해를 입고, 미국의 전비 지원 삭감에 따른 재정부담이 가중되자 이를 감당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러[* 당시 사진들을 보면 분명 프랑스군인데 무기나 기타 장구류가 미제인 게 대부분이다. 미국에서 원조받은 장비가 없으면 보병 무장도 어려운 상황이었다는 뜻.] 8만의 병력을 철수시키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프랑스 내부에서도 점점 장기화되는 명분 없는 식민지 회수 전쟁에 극렬히 반발하고 비판하는 세력이 점차 늘어났다. 노동조합 등이 인도차이나로 가는 프랑스군 장비의 수송을 파업으로 거부하거나 인도차이나 주둔 병사들을 치료하기 위한 [[헌혈]]을 단체로 방해하는 등 프랑스는 자국민 다수에게도 전쟁이 왜 필요하고 이길 수 있는 전쟁인지에 대해 전혀 설득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전쟁 말기에는 인도차이나 식민지에서 프랑스로 귀환한 병사들에게 온갖 거센 비난과 돌과 계란이 날아드는 등 상당히 험악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프랑스 내부의 거센 저항으로 정상적인 전쟁 수행이 어려워지자 극동원정군은 점점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게 되었다. 미국은 중공과 소련의 막대한 원조를 받는 월맹군을 막기 위해 프랑스의 식민지 전쟁을 당장은 지원해도 종국적으로 베트남에 친미 독립 반공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입장이라 프랑스의 본래 목적인 인도차이나의 재정복은 점차 달성에서 멀어지고 있었던 셈. 여기에 계속 발생하는 사상자에 충격을 받은 프랑스 의회가 대규모 징집병의 해외 파병을 금지시키고 유럽에서 냉전이 격화되자 유럽 방어를 위해 극동원정군에서도 병력이 차출되면서 상술되어 있듯이 병력 충원과 증원은커녕 감축을 걱정해야만 할 처지가 되었다. [[파일:845px-First_Indochina_War_map_1954_en.svg.png|width=100%]] 디엔비엔푸 전투가 벌어진 해인 1954년 초의 전황도. 북부 베트남에서는 하노이 일대에만 간신히 포켓 형태로 점령지를 사수하고 중부 베트남까지 싹 밀린데다가 라오스와 캄보디아에도 월맹군 게릴라와 정규군이 점령지를 확보한 프랑스 극동원정군에게 절망적인 판도다. 프랑스 제2제국의 베트남 정복 당시 가장 먼저 확보해 식민지배 기간 동안 거점 역할을 한 코친차이나 일대에조차 월맹군이 점령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나마 코친차이나는 상당 부분 쥐고 있기라도 하지 통킹과 안남은 하노이와 후에 일대의 좁은 지역을 제외하면 죄다 월맹군에 넘어간 셈이다. 결국 1954년 [[프랑스군]]은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참패하고 위신을 있는 대로 깎아먹은 채로 [[베트민]]과 휴전 협정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56일간의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2,000명~3,000명 수준의 전사자를 냈고 8년간의 전쟁에서 총 70,000명의 프랑스군이 전사했다. 베트민은 이보다 많은 사상자를 내고 있었지만 독립을 위해 이런 희생을 감당할 수 있었던 반면 프랑스의 입장에서는 아니었다. 결국 1954년 7월 21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회담을 통해 양측은 휴전 협정을 맺게 되었고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프랑스의 남베트남과 베트민의 북베트남으로 나눠졌으며 8km [[비무장지대|DMZ]]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2년 내에 남북통합 선거를 실시한다는 합의를 하였다. 사실 베트민 입장에선 베트남 전 영토 75%를 장악하고 있었지만, 양보를 한 셈.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